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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 기록_공감과 이해에 관하여 본문

2020년/일상기록

20.07.04 기록_공감과 이해에 관하여

풀빵이 2020. 7. 8. 02:50

원래 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혐오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가끔 그렇곤 한다.

성향의 문제로, 정치적인 문제로,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문제로, 자신이 겪을 일이 아니라는 이유도 배척하고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도 힘이 빠지고 힘든 날들이었다. 신경쓰지 않고자 하여도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조차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면서 살면서 처음으로 성악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말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저사람에 대해서도,

저 사람은 내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존중해서일까

혹은

그져 그런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학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내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지금도 정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스스로도 좀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에는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원인이 있고 그로 인한 결과가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제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나의 감정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혐오를 설명해 보자면 다양한 원인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제도의 문제, 경쟁사회, 입시위주 교육, 혹은 사회 문화의 문제. 공감 부족, 배려 부족, 세대 갈등, 성별 갈등, 개인의 문제까지.

그 모든 원인들을 끝없이 생각하고 인과관계를 정리해본다 한들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 결론이 이 사회이고 나 또한 그 사회의 일원일 뿐인 것을.

사회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나인 것을.

파도의 움직임을 예측해본들 붙잡을 수는 없다.

 


 

세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히틀러에 대해 주변국들의 수장들은 많은 걱정과 우려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수장은 직접 히틀러를 만나러 가서 이야기를 나눴고, 어떤 수장은 만날필요도 없다며 자국을 지킬 대안을 고민했다고 한다.

결과는 전자의 경우는 히틀러가 매우 교양있고 좋은 사람이며, 절대 세계대전 같은 것은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고, 후자의 경우는 철저히 대비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당연히 히틀러를 만났느냐 만나지 않았느냐의 차이.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책(타인의 이해 어쩌고 하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의 광고 일부 내용이었지만, 이전까지의 생각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다양한 맥락과 환경으로 인해 객관성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만나는 것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굳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것이 책의 내용인 것 같았다.

물론 이 책의 신뢰도나 정확한 내용을 떠나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오산'이라는 포인트가 기억에 남았다.

돌아보면 문제를 풀고 맞추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행동을 예측하는데서 이상한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절대 신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데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많이, 더 정확하게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고 그에 맞추기 위해 나는 너무 많은 타인의 감정을 느꼈고, 필요하지 않은 감정소모와 상처를 받았다. 또한 나의 생각이 아닌 타인의 생각에 집중하다보니 타인 중심적인 생각, 행동을 하게 되었다.

타인 중심적인 생각이나 행동이라는 것은 자연스레 심한 자책과도 이어졌다.

왜냐하면 '내가 더 신경썼으면 이런 상황, 행동은 미리 대비할 수 있었을텐데' 라고 계속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나는 타인의 생각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 생각은 심해지면서 자책이 아닌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생각하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하지 않는 것이지' 식으로 말이다.

나는 남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인데 오히려 남을 판단하고, 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과 자만을 키우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남을 이해하겠다고 심리적으로 매일 붙어있고, 고민하는 것보다 오히려 건강한 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 거리는 그 사람이 소중하지 않거나, 내가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아직도 내가 가야할 길은 멀다.

타인의 반응과 말투에 집중하게 된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나에 대해서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나를 이해해야 남을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이 이런 의미인 것일까. 이전에는 그저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좀 더 마음에 와닿기 시작한 것 같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일 때 그 곳에서 새롭게 시간이 시작되고 공간이 생긴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수치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묘사를 하기 어렵고 물리적인 요인들로 인해 유동적이니.

한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주체이고 기준이라면, 그 기준의 중요성과 가치만큼 내 자신의 가치 또한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라도 적어보며 스스로에게도 나의 가치를 다시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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